이카운트 ERP 도입하던 날의 기억
한 3년쯤 됐나. 우리 회사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다들 입을 모아 ERP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냥 구글 스프레드시트 하나에 재고랑 매출을 다 때려 박고 관리했는데, 사람이 30명이 넘어가니까 이게 감당이 안 되더라. 결국 사장님 결재를 받아 이카운트 ERP를 도입하기로 했다. 다들 ‘이제 스마트하게 일하자’며 박수를 쳤던 것 같은데, 막상 도입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지점들에서 자꾸 걸려 넘어졌다.
바코드 찍는 게 왜 이렇게 번거롭던지
처음엔 재고 파악이 참 쉬울 줄 알았다. QR 바코드 리더기를 대여섯 대 사서 창고에 배치했는데, 이게 처음 며칠은 장난감처럼 재밌더니 나중에는 다들 귀찮아서 그냥 예전처럼 수기로 적어내더라. 리더기를 들고 창고 구석진 곳까지 들어가서 제품 하나하나 찍는 게 물리적으로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20만 원이 넘는 리더기들이 지금은 창고 구석 상자 안에 먼지만 쌓여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예전 방식이 손에 익어서인지 시스템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정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랄까.
출퇴근 기록과 야근의 묘한 상관관계
ERP 기능 중에 출퇴근 관리도 있는데, 이게 참 애매하다. 예전에는 그냥 팀장님한테 ‘오늘 좀 늦습니다’ 한마디 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ERP에 접속해서 시간을 찍어야 한다. 문제는 시스템이 너무 정직하다는 거다. 1분만 늦어도 시스템에 기록이 남으니까 괜히 눈치가 보이고, 그러다 보니 출퇴근 버튼 누르기 전에 한 번씩 더 확인하게 된다. 요즘은 다들 폰으로도 하긴 하는데, 가끔 서버 점검이나 앱 오류라도 나면 아침부터 단체 채팅방이 난리다. 효율을 높이자고 도입한 시스템 때문에 아침마다 시스템 접속하느라 5분씩 더 쓰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결국 다시 엑셀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게 제일 웃픈 상황인데, ERP에 데이터를 다 입력해 놓고도 회의 때 보여줄 자료는 다시 엑셀로 정리한다. ERP에서 출력되는 양식이 우리 회사가 매번 보고하던 그 깔끔한 표 모양이랑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당자들은 ERP에서 데이터를 엑셀로 내려받고, 그걸 다시 보기 좋게 폰트 수정하고 선 긋는 작업을 매주 반복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중으로 일하고 있을까’라는 말을 회의 시간마다 누군가는 꼭 한다. 누가 시킨 건 아닌데도, 시스템의 표준 양식이 우리 식의 업무 방식이랑 100% 딱 맞지 않으니까 결국 사람 손이 한 번 더 가게 된다.
도입 전과 후의 미묘한 차이
시스템 자체는 분명 잘 만들어졌다. 재고가 얼마인지, 이번 달 급여가 얼마인지 한눈에 보이는 건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도입 전에는 없던 ‘ERP 관리 업무’라는 게 새로 생겼다. 예전엔 엑셀만 잘하면 됐는데, 이제는 시스템 업데이트 내용도 숙지해야 하고, 오류 나면 고객센터에 문의도 넣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시스템이 우리 업무를 돕는 건지, 우리가 시스템을 위해 업무를 조정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날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결제까지 다 끝나고 전 사원이 아이디까지 다 만들어진 마당에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들 퇴근하면서 ‘다음 주에는 좀 익숙해지겠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를 포함해 다들 마음속으로는 엑셀 파일을 하나씩 더 열어두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완전히 편리해진 것 같으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늘 퇴근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는 이 기분은 뭘까.
